강척을 이겨내신 어느분의 신문내용입니다.
환우 85fa2004-12-15
인터넷 신문을 읽다 좋은 내용이 있어 올립니다.
-세상이 준 사랑 그림으로 보답할 터"강직성척추염 불운 …'걸어다니는 시체' 별명 집념의 재활치료 5년…장애인증 반납 상하이 아트페어 주목 '화려한 부활'
`1급 장애 극복' 불굴의 화가 김용관씨-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담양 창평고 미술실에서 작업 도중 작품과 삶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며 활짝 웃고 있는 김용관씨.
가을걷이가 끝난 너른 들판에 덩그러니 자리한 학교. 전남 담양군 창평면 창평고등학교다. 이 학교에서 미술과목을 담당하고 있는 김용관씨(44·서양화가).
김씨의 화실은 학교 식당 2층에 있다. 가만 생각하면 화실로 통하는 길도 엿들은 그의 인생만큼 꼬이고 복잡하다. 독서실을 지나 작은 창고가 나온다. 크고 작은 캔버스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방안은 아무도 없다. 문쪽에서 학생들의 소리가 들린다.
“김용관 선생님이 어디 계시죠?”
“선생님 사무실에 계세요.”
눈망울이 맑은 여학생이 알려준다.
때마침 김씨가 우리 일행을 알아보고 “반갑습니다”라며 먼저 인사를 건낸다.
검은 가죽 자켓에 배레모를 쓰고 있다. 턱수염 조차 멋있어 보이는 이 사람이 김용관씨란 것을 담박에 알아차린다. 여기 화실에 오기전 그의 전시 팜플릿에서 미리본 사진과 실제 모습은 전혀 달라 보인다.
“사진에서 보다 얼굴이 더 좋아보이네요.”
“그 사진은 5년 전에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을 때 요양원에서 찍었던 사진입니다. 많은 분들이 팜플랫 사진을 보고 지금의 나를 보면 얼굴이 어려보인다고 하곤 합니다. 듣기는 좋지요, 뭐. 허허허.”
김씨는 지난 11월 17일부터 21일까지 중국 상하이 세계무역센터에서 열린 상하이국제아트페어에서 참가해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뒀다고 밝힌다. 초청된 한국 작가 가운데 유일하게 조직위원장으로부터 내년 행사에도 참가해 달라는 초청을 받은 것이다. 그뿐아니라 출품작 `인간사-생성'이 1만달러에 팔렸다. 김씨에겐 이번 작품판매가 단지 작품 한점을 팔아 돈을 벌었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1만불을 손에 쥐었을 때 그 동안 눈물 삼키고 살아나려고 발버둥 친 고통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쳤기 때문이다. 울컥 치솟는 울음을 참느라 혼났다는 거다. 고생고생한 보람이 예상치않은 이국의 국제무대에서 찾아오리라곤 생각조차 못한 때문이다. 너무나 감격스러워 지금도 그 감흥의 전율이 온 가슴을 짜릿하게 일어난단다.
지난 3년 동안 몸을, 아니 자신의 평생지기인 붓조차 들 수 없었던 것을 따져보면 `인간부활' 그 차제나 다름없다. 더욱이 그의 가시밭길 같은 지난 이야기에 콧대 높은 중국 미술계의 마음을 녹였으니 그 자부심 또한 남다르다.
“이번 행사에는 국내 28개 화랑이 참가했습니다. 저는 조선화랑의 소속작가로서 100호 6점을 출품했지요. 또 하나의 성과는 상하이 YMCA로부터 주목받아 이 단체의 초청으로 상하이신문 등 현지의 13개 언론사와 미술 관계자이 참석하가운데 기자회견도 가졌습니다. 작가로서 매우 보람이 큰 행사였습니다.”
사무실로 발길을 옮겨 보니 책장 가득 레코드 음반 크기의 캔버스들이 꽂혀있다.
“큰 작품을 보관할 장소가 없어 작은 크기의 캔버스로 나눠 그림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온다고 학생들을 불러 청소해서 이 정도지 안 그랬으면 어디 앉을 곳도 없었을 겁니다.”
얼픗 보기에 그의 작품은 흔히 보는 풍경화나 정물화와는 많이 다르다. 김씨의 전시회 작품 해설 비디오를 잠시 보고서야 조금은 알수 있을 것같다. 자신의 아픔을 담듯 `영적 구원'을 통한 영원한 삶에 대한 환희를 표현하고 있다. 생명의 생성과 상생, 영혼 구원을 기쁨의 근원으로 재해석했다.
83년 전남도전 입상을 시작으로 20년 동안 김씨는 하루도 붓을 놓지 않고 10시간 이상씩 작업을 했다. 학교 식당 지하에 위치한 화실에서 11년 동안 그림을 그리다 어느순간부터 몸이 뻣뻣해지기 시작하면서 움직일 수 없었다. `강직성 척추염' 판정을 받고 시작된 5년간 재활 훈련은 김씨와 부인 유현덕씨(41)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강진의 요양소에서 4∼6시간씩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요가와 재활 치료를 병행했고 그 결과 부인은 요가 자격증까지 따 지금은 요가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됐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망을 실행하지 못할 때의 상실감은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는 아무도 모를 겁니다. 만약 그 때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이런 제 모습은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항상 존경하고 고맙게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걸어 다니는 시체'로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 지금은 어디서도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투병 생활 동안 그는 한가지 결심을 했다.
“지금은 내가 이렇게 학생들에게 불편을 주고 있지만 20년 후에는 우리 선생님이 저 분이다고 말할 수 있게 열심히 작품 활동에 매진하겠다고 말입니다.”“
이제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된 그는 최근 국가에 장애인증을 반납했다.
“아들이 그림을 그린다고 하니까 어머니는 그만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죠. 아버지 역시 실명을 하실 정도였어요. 그래서 신체 장애를 이기기 위한 피눈물나는 투병과 재활치료를 했습니다. 140만원을 들여 정상인 진단서를 받아 장애인증과 함께 국가에 되돌려줬습니다.”
김씨는 그림으로 자기만의 언어·소리·영생에 대한 꿈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추구하고 나아가는 것에서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한다. 김씨는 그림을 그린다는 축복이라고 한다.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을 표현할 수 있는 점에 축복 받았다고 생각한다.
작업실에 앉아 있으면 색들이 자신을 유혹한단다. 나를 여기에 써줘라는 색들의 유혹이 김씨의 귀에 들린다. 이렇게 자신을 홀리는 색들의 유혹에 넘어가 색을 통제하지 못해 실패한 그림도 많았다. 5년 전부터는 자신있게 색을 통제할 수 있게 됐다.
“지금 내가 그리는 그림은 지구상에 단 하나뿐인 `메이드 인 김용관표' 그림입니다. 만약에 단순한 작업에 그쳤다면 안그려진다고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색에서 느껴지고 쏟아지는 것을 표현하기에도 바쁩니다.”
김씨는 그림을 천직으로 알고 오늘도 묵묵히 그림을 그린다.
“저는 다시 태어나도 그림을 그릴 것입니다. 색의 소리가 내 인생의 신명이자 삶의 원천입니다. 그리고 아는 것도 그림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옆에서 힘들다는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지켜봐준 고마운 분들을 위해 다시 붓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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